뉴버전으로 업데이트된 삼국지(三国志)--51회, 52회
삼국지 인물열전(51)
촉나라의 인물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재상 ‘제갈량’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은 유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파고들어가 보면 전반부는 조조, 후반부는 제갈량이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세 사람, 즉 유비와 조조, 그리고 제갈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삼국지 후반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갈량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갈량(諸葛亮). 자는 공명(孔明), 삼국지연의에 의해 거의 신격화된 사람으로, 주 문왕 서백후를 도운 강태공(여상), 한 고조 유방을 도운 장자방(장량)과 함께 오천 년 중국사에서 3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찍 부모를 여읜 제갈량 형제들은 숙부와 함께 양양의 융중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거기서 주경야독하면서 가슴속의 이상을 키워가고 있다가, 형 제갈근은 오나라로 건너가 손권의 참모가 되었고 제갈량은 유비를 섬기는 촉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안 조카 제갈탄은 위나라의 장수로 있으면서 후일 사마소의 찬탈기도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당시 ‘오는 호랑이를 얻고 촉은 용을 얻었는데 위는 개를 얻었다.’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제갈량이 세상에 나온 것은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제갈량이 주로 경세(經世)를 겨냥한 학문을 익혀왔고, 당대의 재사들과 교유(交遊)를 통해 천하대세를 가늠할 식견과 안목을 기르고 있었다는 점, 스스로를 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로 비유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명문가와 결속을 맺고 신분상승을 꾀한 것도 그가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리라. 제갈량의 장인은 그곳의 호족인 명사(名士) 황승언, 장모는 형주 제일의 명문 채 씨 집안의 딸로서 형주자사 유표의 부인과 자매였다.
제갈량은 분명히 세상에 나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미 확고한 터전과 많은 인재를 보유한 조조와 손권보다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유비를 주군으로 택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명하면서 서촉에서 기업(基業)하여 오와 힘을 합쳐 위를 공략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약관 27세의 제갈량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부터, 한때 천하의 7할을 석권했던 조조가 참담한 좌절을 맛보게 됨은 물론, 삼국지의 주역 자리도 그에게 빼앗기고 만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5만 연합군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명장 주유의 공이 크지만, 그것도 제갈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기도로 동남풍을 불게 하기도 하고, 공성(空城)에서 거문고 하나로 적의 대군을 물리치기도 하고, 또 축지법을 써서 추격하는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의 행적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부풀려진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제갈량이 왔다가 울고 가겠다.’는 말이 있다. 지략이 뛰어난 제갈량이 상대방의 지략에 놀라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겠다는 뜻으로, 지혜와 책략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제갈량이 지략의 대명사임을 방증하는 속담이다.
제갈량의 기량을 정치가와 군략가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먼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자. 어리석은 촉주 유선을 하늘처럼 받들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명재상으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국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똑똑한 2인자가 아둔하기 짝이 없는 1인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흠으로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크고 작은 일 모두에 관여했던 점을 드는 사람이 많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는 점과 상벌이 엄격하고 공평무사했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 군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자. 촉의 5~6배에 달하는 위의 국력을 감안해보면, 앉아서 망하느니보다는 싸워서 활로를 찾는 전략을 택한 것은 분명 현명한 판단이다.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6차에 걸쳐 공세를 취한 사실만으로도 그가 뛰어난 군략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적장 사마의가 시종일관 수비에 치중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첫 북벌 때 용장 위연이 제안한, 지름길로 장안을 치는 기습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안전 위주의 지지 않는 전략으로 일관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전쟁에는 도박도 필요한 법이다.
위와의 전투에서 제갈량은 여러 차례 신출귀몰하는 지략을 펼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한다. 분골쇄신하던 제갈량, 드디어 오장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그의 나이 54세, 병명은 과로로 인한 폐결핵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가 죽자, 그와 함께 중원을 다툰 위의 명장 사마의는 이런 말을 남긴다.
“공명은 참으로 천하의 기재이다.”
제갈량이 삼국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필두로, 그의 행보를 따라 수어지교(水魚之交), 만두(饅頭), 칠종칠금(七縱七擒), 출사표(出師表), 읍참마속(泣斬馬謖) 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된, 요즘말로 뉴스메이커였던 셈이다.
그가 죽은 후에 보니 그의 재산은 ‘뽕나무 8백 그루와 전답 15경(頃)’이 전부였다고 한다. 청빈한 공직자로서도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촉장 마속의 막하에 있던 진식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마속이 제갈량에 의해 목이 베어질 때 진식도 함께 요참(腰斬)을 당했다. 그런 악연이 있음을 감안하면서 진수가 쓴 제갈량에 대한 인물평을 보자.
‘해마다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니 장수로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줄 알았으니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가히 관중과 소하에 견줄 만했다.’
다음에 중국에 가게 되면 사천성 성도에 있는 무후사(武侯祠)를 꼭 한번 찾아가 제갈량 전(殿)에 참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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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열전(52)
촉나라의 인물들, 제갈량에 버금가는 준재(俊才) ‘방통’
형주의 신야에서 인재를 구하고 있던 유비는, 수경선생 사마휘로부터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중에서 한 사람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사마휘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재를 뜻하는 ‘복룡봉추’는 여기서 생겨난 말이다.
복룡은 하늘에 오를 때를 기다리는 숨어있는 용으로 제갈량을, 봉추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끼봉황을 의미하는데 방통을 지칭하는 말이다. 둘 다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여 자유자재로 지략을 펼치고 군사를 부리는 재주를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제갈량에 버금가는 재주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준재(俊才) 방통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봉추 방통(龐統), 자는 사원(士元). 적벽대전 때 오군 총사령관 주유의 요청을 받고 조조 진영을 찾아가 조조군의 선단을 쇠사슬로 묶게 하여 오나라 수군이 조조의 백만대군을 화공(火攻)으로 괴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다.
방통은 주유의 뒤를 이어 오군 총사령관이 된 노숙의 천거로 오주 손권을 만났지만, 그의 용모에 실망한 손권은 그를 채용하지 않았다. 그의 라이벌 제갈량이 준수한 용모를 지닌데 비해, 방통의 용모는 너무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노숙과 제갈량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은 방통은 다시 유비를 찾아갔다. 그리고 일부러 추천장은 내놓지 않고 인사를 했다. 우레 같은 명성에 비해 용모가 미치지 못한 데에 실망한 유비는 그에게 조그만 고을의 현령 자리를 하나 내주었다. 방통은 자신을 겨우 현령 감으로밖에 보지 않은 데에 화가 났으나 애써 참으며 유비가 내린 벼슬을 받고 임지로 떠났다.
유비는 방통이 매일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장비에게 직접 가서 확인해보도록 지시했다. 장비가 뇌양현에 이르자, 관리들이 모두 나와 맞이하는데 방통은 보이지 않았다. 방 현령을 찾으니 한 관리가 기다렸다는 듯 일러바쳤다.
“방 현령은 부임한 뒤로 지금까지 백여 일 동안 고을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것입니다.”
장비가 방 현령을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자, 이윽고 벌겋게 취한 방통이 나타났다. 장비가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어찌하여 일은 하지 않고 매일 술타령만 했느냐?’고 물었다.
방통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까짓 백 리도 안 되는 고을의 일이야 뭐 어려울 게 있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금방 해치울 테니.”
방통이 그동안 밀린 서류를 모두 가져오라고 하자, 관리들이 이런저런 문서며 밀린 송사(訟事) 자료들을 가져왔다. 그는 손으로 문서를 넘기며 입으로는 처리 방향을 지시하고, 이어 송사의 판결을 내리는데 누가 들어도 합당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백여 일이나 밀린 관청 일을 반나절도 안 되어 모두 깔끔하게 처결하는 것을 본 장비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아온 장비가 유비에게 그간의 일을 자세히 고하자, 깜짝 놀란 유비는 대 현인을 몰라본 자신의 과오를 크게 뉘우쳤다.
유비는 방통을 모셔오게 한 다음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자신의 잘못을 빌고, 곧바로 그를 군사 제갈량과 함께 전략을 수립하는 부군사(副軍師)로 임명했다. 드디어 방통은 제갈량과 함께 유비의 양쪽 날개가 된 것이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형주를 지키게 하고, 방통을 정벌군의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서촉 공략에 나섰다. 정벌군은 방통의 계책 덕분에 연승을 거듭, 서촉 지역을 한 군데씩 점령해나갔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정벌군은 낙성에 이르는 갈림길 앞에 이르자 잠깐 멈춰 섰다. 이때 형주에 있는 제갈량으로부터 서찰이 왔다. 유비가 읽어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제가 간밤에 천문을 보니 으뜸장수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조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한 번 더 살펴보시고 함부로 가볍게 나아가지 마십시오.”
유비는 진군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하며 방통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찰을 찬찬히 훑어본 방통은 서촉 공략에서 자신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제갈량이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간밤에 천문을 보았습니다만, 그것이 꼭 우리 쪽 으뜸장수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조짐은 아닙니다. 걱정 마시고 진군을 계속하십시오.”
마음이 내키지 않던 유비는 방통이 거듭 권하자, 다시 마음을 바꾸고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진군하여 낙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통이 낙마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를 본 유비는 방통의 말이 너무 여윈 것을 헤아리고 자신이 타던 백마를 내주고 자신은 다른 말을 탔다. 방통은 감읍하며 유비가 타던 백마를 타고 출발했다.
이윽고 어느 산의 소로(小路) 입구에 이르자, 방통은 문득 주위에 가득한 살기를 느끼고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한 부하장수가 대답했다.
“낙봉파입니다.”
방통은 깜짝 놀라며 군사들에게 이곳을 속히 통과하라고 지시했다. 낙봉파(落鳳坡)라면 봉황이 떨어지는 곳이란 뜻이고, 자신이 바로 새끼봉황이 아닌가.
그 순간, 함성이 일며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산언덕에 매복한 촉병들이 봉추가 탄 백마를 보고 유비인 줄 알고 집중해서 활을 쏜 것이었다. 방통은 그 자리에서 온 몸에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처럼 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제갈량과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비극이었는지, 방통의 큰 재주는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꺾이고 말았다. 새끼봉황은 끝내 대붕(大鵬)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갈량은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방통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던 것이다.
방통이 오래 살아남아 제갈량과 적절히 역할분담을 했더라면 관우가 그렇게 어이없게 형주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북벌 때 한 사람이 성도에 남아서 후주 유선을 보좌했더라면 촉이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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