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59부 -- 위 나라의 인물들 : "건안칠자의 선두, 공자의 후손" '공융'
삼국지/59부
위 나라의 인물들
"건안칠자의 선두, 공자의 후손" '공융'
공융(孔融), 공자(孔子)의 20대손으로 어릴 때 부터 재기(才氣)가 뛰어났다. 열살 무렵 이응이라는 선비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응은 함께 있던 손님에게 공융의 재주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참으로 총명하다네. 후일 나라에 큰일을 할 걸세!”
그러나 손님은 어린 공융을 보며 대수롭잖은 듯 ‘어릴 때 총명하면 십중팔구 어른이 되어서는 그렇지 못 하다네!’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공융,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꾸했다. “그 말씀이 옳다면 어른께서는 틀림없이 어렸을 때 총명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손님은 꼬마의 당돌한 응답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공융은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갔다가 승승장구, 마침내 '북해'태수에 이르렀다. 그는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몹시 좋아하여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객실에는 항상 귀한 손님이 가득하고, 술독에는 술이 비지 않는 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바이다!”
포악한 독재자 동탁을 무찌르기 위해 각지의 제후들이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 공융도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여 중앙무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한때 유비의 도움을 받아 '북해'성을 포위한 황건적을 물리친 적도 있었지만, 그 후에는 조조가 있는 '허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의 문사들가운데 특출한 7인을 가리키는 건안 칠자(建安七子) 중에서도 선두로 꼽히는 공융의 우뚝 솟은 문명(文名)은 정통성 확보에 고심하고 있던 조조에게도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공융은 종종 입바른 소리를하여 조조의 미움을 사곤했다.
조조가 술의 폐해를 지적하며 금주령을 내렸을 때, 그것이 조조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조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융은 이런 글을 올려 조조의 처사를 꼬집었다. “술은 옛날부터 조상을 제사 지내고 귀신을 위로하며 사람의 괴로움을 가라앉혀 줍니다. 술이 나라를 망치기 때문에 금주령을 내린다면 여자 때문에 천하를 잃는 자가 있는데도 왜 혼인을 금하지 않습니까?”
또,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원소의 둘째 며느리 견씨를 자신의 맏며느리로 삼아놓고 여론의 지탄을 받을까봐 고심하자, 공융은 ‘옛날 '주'의 무왕은 '은'나라를 친 뒤에 달기라는 미인을 주공(周公)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내심 꺼림칙하던 조조는 예전에 유사한 고사가 있었다는 말에 아주 반가워하며 그 출전을 물었다. 그러나 공융의 대답은 엉뚱했다. “지금의 일로 옛일을 추측해 보았을 뿐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전례가 없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즉, 조조의 떳떳치 못한 처사를 다시 한 번 드러내놓고 비꼰 것이 아닌가.
조조가 '형주'의 유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당한 세객을 찾고 있을 때, 공융은 대쪽 같은 성품과 기행(奇行)으로 이름 높은 당대의 재사 예형을 추천했다. 불려온 예형은 조조를 심하게 욕보인 후 사신으로 '형주'에 갔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일은 그를 추천한 공융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조조의 장수 하후돈이 '형주'의 신야에서 힘을 기르고 있던 유비에게 참패하고 돌아오자, 조조는 몸소 50만 대군을 이끌고 유비와 유표를 정벌하는 장도에 나섰다. 공융이 막아섰다. “유비와 유표는 둘 다 '한'실의 종친으로 인망이 높으니 그들을 치는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조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은근히 유비를 편들면서 조조의 정벌군을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했으니 과연 무사할 것인가. 조조는 공융을 꾸짖으며 ‘앞으로 또다시 공융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목을 베리라.’ 하며 못을 박았다.
공융은 조조의 그 같은 꾸짖음이 아니꼬웠다. 가문이나 학식, 문장 등 어느 것을 따져보아도 자신이 조조에게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는 승상부를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어질지 못한 군사로 어진 군사를 치려고 하니 어찌 패하지 않으랴.’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더 부풀려서 조조에게 고자질했다.
“공융은 평소에도 늘 승상을 욕해 왔습니다. 또 전에, 죽은 예형이 승상을 욕보인 것도 실은 공융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이제 조조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에, 예형은 공융을 일컬어 ‘공자는 죽지 않았다[仲尼不死]’고 했고, 공융은 예형에게 ‘안회가 다시 살아났다[顔回復生]’고 화답하는 등 둘이서 아니꼬운 작당놀음을 하던일도 생각났다.
조조는 마침내 공융에게 대역죄를 덮어씌워 죽일 결심을 하고 공융의 가솔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공융은 두 아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가신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두 아들이라도 피신하게 하여 가문을 보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공융에 앞서 두 아들이 먼저 당당하게 말했다. “둥지가 부서지는데 어찌 성한 알이 남아 있을 수 있겠소?”
그 아비에 그 아들인가! 곧이어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공융의 일가붙이는 남김없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고 공융의 목은 저잣거리에 내걸리고 말았다.
늘 그랬듯이, 조조는 무장들의 실수나 패전에는 관대했으나 문사들의 실수나 과오에는 비정 할 정도로 가혹했다. 조조의 입장에서 볼 때, 문사들의 이런 돌출행동은 썩은 선비들의 작당놀음이나 유희로 보였던 모양이다.
특히 공융은 공자의 후손이라는 눈부신 가문으로 환관가문 출신 조조의 열등감을 부채질했고, 또 그의 우레같은 명성과 뛰어난 문장은 나름대로 문학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조조의 비위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런데다 '한조'에 대한 충성을 앞세워 조조의 정책과 언동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조조의 심기를 자주 건드렸다.
공융이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 선비로서 더할 나위없는 명예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 보면 지나친 우월감에서 비롯된 오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좀 더 유연하게 처신하여 가문의 긍지를 지키고 이어가는 것이 진정한 자부심이고 명예가 아닐런지 생각이 듭니다.
@ 카카오 Kim Cheol